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순왕후(조선 영조) (문단 편집) === 정조는 왜 김귀주를 숙청했을까? === 문제의 영조 46년([[1770년]]) 3월, 남당의 [[김귀주]]는 유생 한유를 시켜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북당의 [[홍봉한]]을 직격했다. 이른바 '''《망국동 망정승》''' 상소이다. 이 상소에서 남당의 한유는 [[홍봉한]]이 사는 '[[안국동]]'을 망국동이라고 부르는 세간의 민심을 거론했으며, 무엇보다 "일물", 즉 [[뒤주]]를 직접 들여보내 [[임오화변]]에 적극 나선 점을 공격했는데, 바로 이 대목이 [[영조]]의 [[역린|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 되었다. >'''한유를 체포하여 오니 상소의 내용에 대해 신문하다''' >---- >'''금오랑(金吾郞, 죄인을 잡아오는 의금부도사)'''이 한유(韓鍮)를 체포하여 오니, [[영조|임금]]이 묻기를, >>"네가 올린 것은 무슨 상소인가?" >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홍봉한|영신]](佞臣,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악독한 신하)을 탄핵한 상소입니다." >하였다. [[영조|임금]]이 승지에게 그 상소를 읽으라 명하였는데, >첫째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을 팔뚝에 새기고 도끼를 짊어지고서 죽음을 맹세하였음을 말하였으며, >'''주운(朱雲)'''[*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사람. 벼슬이 괴리령(槐里令)으로, "상방검(尙方劍)을 빌려서 영신(佞臣) 장우(張禹)를 베이기를 원한다."고 글을 올리자, 성제가 크게 노하여 죽이려 하였다. 어사(御史)를 시켜 끌어내려고 하자, 주운이 궁전의 난간(欄干)을 붙들고 버티다가 난간이 부러지니, 부르짖기를 "신(臣)은 용방(龍逢)·비간(比干)과 지하(地下)에서 함께 놀면 만족하겠습니다." 하니, 성제가 놓아주라 명하고 그 부러진 난간을 바꾸지 말게 하여 직신(直臣)을 정포(旌褒)한 고사(故事)를 이르는 말.]을 끌어대어 자신에게 견주기까지 하였다. >이어 [[홍봉한]]의 부자 형제가 차례로 과시(科試, 과거시험 합격)를 차지하여 모두 요로(要路, 관직출세의 중요한 길)를 점거하였으며, >권력을 탐하여 마음대로 휘두르므로써 나라를 그르친 죄를 극언(極言)하고, 그 아들 '''홍낙인(洪樂仁)'''은 교활하고 광패(狂悖, 사납고 막됨)하며, >그 아우 [[홍인한]](洪麟漢)은 호번(湖藩, [[전라도]])에서 탐학하여 사람들이 그 고기를 먹으려 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망국동(亡國洞)의 망정승(亡政丞)은 이미 동요(童謠)를 이루었습니다." >하였는데, 대개 '''[[홍봉한]]'''이 [[안국동]](安國洞)에 거주하기 때문이었다. >(중략) >[[영조|임금]]이 말하기를, >>"상소 중에 '''주운(朱雲)'''을 일컬은 것은 네가 [[조선]](朝鮮)에서 한 직(直) 자를 얻으려고 이 짓을 한 것인가?" >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오로지 나라를 위한 데에서 나왔습니다. 비록 몸이 곧 반쪽이 난다 하더라도 성교(聖敎, 임금의 하교)의 온당(穩當)함을 모르겠습니다." >(중략) >[[영조|임금]]이 말하기를, >>"40년 고심(苦心)에 다만 [[영의정|영부사]]([[홍봉한]]) 한 사람이 나를 '''협찬(協贊, 협력하고 찬성함)'''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마음에 달갑게 앙갚음하려는 것은 곧 당인(黨人)들의 사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 차례 [[고문|형추]](刑推)를 한 뒤에 하교하기를, >>"인심과 세도(世道)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작년에 '''한집(韓鏶)'''이 있었고, 금년에는 한유가 있다. >>그들을 10촌간이라 말하지 말라. 그 마음은 하나 같다. 더구나 '''신경(申暻)'''을 처분한 일이 어찌 상신(相臣, 삼정승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아룀으로 말미암았는가? 당인을 유배한 것은 모두 [[영조|임금]]으로부터 말미암았는데, 감히 '''[[조선/왕사|임금]]'''에게는 분풀이를 못하고 >>그때의 보상(輔相, 대신)에게 마음에 달갑도록 앙갚음하려 함은, 곧 길 가는 사람도 아는 바이다." >하고, 유생의 이름을 유적(儒籍, 유생의 명부)에서 삭제하고 '''[[흑산도]](黑山島)'''로 [[유배|정배]](定配)하되 하고, >사흘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押送)하고, 그 상소는 불태우라 명하였다. >---- >-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1770년]], 청 건륭(乾隆) 35년) 3월 22일 (기해) 1번째기사''' 이에 [[영조]]는 매우 격노하며 한유를 찢어죽여 시원찮을 판에 죽이라고 명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서남해의 [[흑산도]]'''로 강행군 하듯 사흘 길을 하루 안에 주파하게끔 정말 힘들게 [[유배]]보냈다. 북당의 [[홍봉한]]은 잠깐 [[유배]]를 당했으나 [[혜경궁 홍씨|혜경궁]]의 핑계로 바로 복직이 되었고, 남당의 [[김귀주]]는 회심의 일격에 판정패를 당한 셈이 되었다. 한유의 상소가 실패한 직후, [[김귀주]]는 영조 48년([[1772년]], 임진년) 직접 상소를 올렸다. 요지는 [[홍봉한]]이 [[정조(조선)|세손]]을 이용해 뭔가를 해보려고 한다는 내용이었고, 정황상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추존|추숭]]을 주장했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김귀주]]의 행보가 [[정조(조선)|세손]]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영조]]가 [[정조(조선)|세손]]에게 그 이야기를 물어보자 [[정조(조선)|세손]]은 비를 맞으며 대성통곡했다. 이에 [[영조]]는 이 상소로 [[김귀주]]의 [[너 인성 문제 있어?|사람됨이 염려된다]]며 회초리를 등에 지고 [[석고대죄]]를 하라는 육단부형(肉袒負荊)까지 내리게 되었다. [[김귀주]]는 아래와 같이 잘못을 [[영조]]에게 고하면서 빌어 용서를 받았다. >'''김귀주의 재소를 읽고 그 사림됨을 염려하다''' >---- >>"실로 어리석고 경솔함을 인연해서 무지하게 망령된 행동이 당습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감히 성교(聖敎, 임금의 하교)로 엄히 묻는 아래에서 변명하겠습니까?" >라고 후회했으나, [[영조|임금]]은 다시 한번 질책했고 >(중략) >>"차후에 만약 다시 이런 마음이 싹튼다면 장차 임금을 저버리고 선인(先人)을 저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라는 말이 나오고서야 용서했다. >---- >- '''《[[영조실록]]》 119권, 영조 48년([[1772년]], 청 건륭(乾隆) 37년) 7월 23일 (병진) 2번째기사''' [[정조(조선)|정조]] 즉위 직후 [[김귀주]]는 정2품의 한성부 판윤[* [[김귀주]]는 나름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 직(職)정도 되는 중요한 자리에 올랐다.]이 되었지만, 이 직후 숙적인 [[홍봉한]]을 공격하는 회심의 상소를 한번 더 올렸다. 그러나 [[정조(조선)|정조]]는 오히려 이전 일을 언급하며 남당의 [[김귀주]]를 [[유배|귀양]]보냈다. [[정조(조선)|정조]]는 바로 이때 [[김귀주]]가 [[왕세손|세손]] 시절의 자신이 정순왕후에게 아뢴 내용을 곡해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홍봉한|외조부]]와 사사로이 나눈 대화이며 가정을 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는 것이다. 어릴 때라 정순왕후하고도 스스럼 없게 얘기 나눈 것을 김귀주가 듣고 상소에 올렸다는 것. [[정조(조선)|정조]]의 [[김귀주]] [[숙청]]은 상당히 강도가 높았는데, [[사약|사사]] 명령까지 직접 내렸지만 곧 환수되었다. 결국 [[정조(조선)|정조]]는 외조부인 [[홍봉한]]의 발언을 "[[사도세자]]를 [[추존|추숭]]하지 않을 경우 추숭을 빌미로 틈을 노리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멘트로 이해했고, 이를 다소 경계하면서 정순왕후에게 전달했다. 문제는 이 발언을 [[김귀주]]가 직접 문제삼으면서 '''[[홍봉한]]을 죽이기 위해 [[정조(조선)|세손]] 자신까지 위태롭게 했다'''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영조 48년([[1772년]]), 당시 [[왕세손|세손]]이었던 [[정조(조선)|정조]]가 외조부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는데, 거기에도 [[김귀주]]의 상소에 대해 >"흉악하고 반역스러운 심보, 분통이 터져 관이 찢어질 정도" 라고 표현할 정도로 [[김귀주]]에게 정말 엄청나게 격노하고 있다. 정조 23년([[1799년]])경에 외숙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 당시 일이 언급되어 있다. 사실 앞서 보듯이 [[정조(조선)|정조]]에게 즉위 이전 위협이 되는 세력은 외가인 [[풍산 홍씨]](북당)였지 [[경주 김씨]](남당)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김귀주]]는 이렇다 할 죄가 없는데 [[정조(조선)|정조]]가 그를 [[숙청]]하는 정황이 엿보인다는 해석도 있다.[* [[박시백]]은 이것을 [[김귀주]]가 권신이 되면 [[홍봉한]]보다 더 위험한 막강한 권력자가 되어 [[정조(조선)|정조]]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실제로 [[김귀주]]의 능력과 정략은 [[홍봉한]]을 능가할 정도였고, 정순왕후의 카리스마와 권위가 더해지면, 무시무시한 존재가 될게 뻔했기에 [[정조(조선)|정조]]가 그를 실각시켰다는 것이다. [[정조(조선)|정조]]뿐만 아니라 [[조선/왕사|역대 제왕들]]도 권신을 적당히 이용하다가 자신의 위엄을 넘보면 꼬투리 잡아 실각시키는게 다반사였다. [[정조(조선)|정조]]의 행보 자체가 명분 없는 단순 [[토사구팽]]만은 아니었는데, 당장 청명당의 일원인 [[김종수(조선)|김종수]]도 [[김귀주]] [[숙청]]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즉, 어떻게 보면 [[정조(조선)|정조]]가 [[김귀주]]와 [[정순왕후]]를 '배신'한 셈이었다'''.[* 다만 [[영조]] 시대에 [[김귀주]]를 [[배신]]한 것은 [[정후겸]]도 있었다. [[홍봉한]]과 [[홍인한]]을 몰아내려고 [[정후겸]]과 합작했지만 [[정후겸]]이 [[홍인한]] 쪽으로 붙는 [[철새(정치)|철새]] 같은 짓을 해버린 것. 결국 [[정후겸]]은 [[정조(조선)|정조]] 즉위 직후 바로 '''[[죽음|그 댓가]]'''를 달게 받는다.] '''이후 정순왕후는 [[정조(조선)|정조]]의 보호자에서 궐내 견제자, [[벽파]]의 중심점으로 거듭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